이호재 (종교학, 전 성균관대 교수)
들어가며 - 전혁림 미술상의 권위
2023년 5월 19일에서 31일까지 갤러리 내일에서 주최된 홍영숙 작가의 “쉬멍 놀멍”전시회에 필자는 “한국 영성예술의가능성을 엿보다“라는 소개 글을 썼다. 이 글이 인연이 되어 전시회도 참가하고 소수의 미술관계자도 알게 되었다. 한국 화단에 어떤 학연도 존재하지 않고 가난한 작품활동으로 겨우 페이스북이라는 개인 공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였던 작가에게 ‘제9회 전혁림 미술상’이 수여된 것은 그야말로 ‘화단의 기적’이라는 소리마저 들린다.
전혁림은 오방색과 코발트블루로서 한국의 현재를 표현하고 재료 및 색상의 전통성과 주제의 다양성, 색채의 단순성 등으로 그 핵심을 드러내며 한국미술이 지향해야 할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화가이다. 그가 사용하는 색상들은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인 풍류성을 드러낸다. 전혁림을 대표하는 《코리아환타지 12》(1989), 《일륜월륜》(1993), 《살풀이》(1993), 《한려수도의 추상적 풍경》(2005), 《통영항》(2005) 및 전통 목기와 만난 《새 만다라》등에서는 풍류적 서정이 짙게 표현되었다.
2015년 초대부터 전혁림 예술제 운영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이환(이영미술관 관장)은 전혁림 미술상의 기획 취지를 전혁림의 화가정신을 계승하며 “한평생 한국 미술의 독창성을 보편화하기 위한 작업에 자신의 삶과 예술혼을 불태우는 미술인을 발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9회 전혁림 미술상의 수상자 홍영숙 작가에 대한 심사위원 4명의 다채로운 심사평은 퍽 인상적이다. 심사위원장인 김종근은 “지칠 줄 모르는 작가의 열정과 구상성과 추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색채로 표현하는 양식이 전혁림의 한 세계와 흐름을 같이 한다.”고 평가하며 “전혁림미술상이 작가로서 발돋움하고 크게 나아가는 데 밑거름이 되고 명예가 돼 자부심을 갖고 훌륭한 작가로 성장해 나갈 것을 부탁드린다”고 시상 축하를 했다. 이 상은 오직 작가의 작품과 예술적 삶을 심사대상으로 삼는다. 짧은 역사에도 한국 화단에 권위를 가진 미술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운영되고 있는 것은 자랑할 만하다. 매회 수상자를 선출하면서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는 사실은 공정한 운영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제9회 전혁림 미술상의 현장에 참가했던 김이환 운영위원장, 김종근 심사위원장, 국회의원, 시(의원)정치인, 관계 미술인, 그리고 전혁림 미술관을 운영하고 이 행사를 주최한 전영근 관장 등이 지속적으로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전혁림 미술상이 통영의 미술상이 아니라 세계적인 권위있는 미술상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풍류화가의 탄생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홍영숙은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를 포월(包越)한 영성(靈聖)의 세계를 표현하는 풍류화가이다. 작가는 자유분방한 천성적인 성격으로 특정한 틀에 얽매인 작품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녀는‘광부화가’라고 불리운 황재형의 지지와 덕성여대 은사이자 저항의 여류작가였던 최욱경(1940-1985)의 직접적 영향 아래 뉴욕 유학 중에 존 워커(John Walker), 글렌 골드버그(Glenn Goldberg) 등 많은 현지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자연스럽게 체험하여 바람과 같은 자유로운 화풍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지도교수였던 존 워커는 그녀를 ‘한국의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라고 칭할 정도로 천재성을 엿본 것 같다. 특히 버몬트(Vermont)의 Artist Residency 프로그램과 맨해튼의 New York Studio School도 그런 경로로 연계되어 석사 과정 이후에도 유학생 신분으로 폭넓은 작품제작에 몰두한다.
이런 체계적인 학습과정에 주목한 New York Studio School 학장인 그래함 닉슨(Graham Nickson)의 추천으로 1998년 무렵 Pratt Institute의 MFA 과정인 Computer Graphics & Interactive Media 분야에서 ‘유일한 Artist 출신’으로서 회화 작업과 컴퓨터를 병행한 작품활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녀는 컴퓨터 작업으로 색채의 혼색과 발색 과정을 추적하여 자신의 회화 작업에 응용해서 조형화하는 기법을 보여준다. 평면을 무수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표현된 그녀의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을 함축하며 입체적인 조형성으로 확장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녀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대칭성과 비대칭성, 평면과 입체성, 확산하면서 확장되는 영원회귀의 원만스러움은 이런 템페라와 컴퓨터와 작가의 구조적인 조형의식의 결합으로 표현된다.
그녀는 오랜 세월을 해외에서 공부하다 부모님을 간병하기 위해 귀국하여 화단에 뒤늦게 등장한다. 그녀의 작품 속에 혼돈과 아픔과 눈물방울과 어지러움은 갈 길을 알면서도 갈 수 없는 한계적 상황의 자기표현이다. 동시에 그 상황에서도 고독과 고민을 소화하며, 정착이라는 예술가로서의 죽음의 나락에 빠지지 않고 이를 풍류적인 정서로 승화시켜 생명을 잉태한 생동하는 화법으로 관람자와 소통한다. 그녀의 천성적인 자유로운 기질과 성장기에 습득한 민중의식의 저항성은 오랜 세월의 뉴욕 유학시절을 거치면서 동서양의 경계인으로 고독과 향수를 발현하면서 구도자적인 작품으로 그려낸다.
한국의 풍류의 예맥을 계승한 풍류화가 홍영숙 작자의 작품세계
풍류화가 홍영숙은 우주라는 캔버스에 바람(風)과 같이 원형의 색의 흐름(流)을 자유자재로 응용하여 확장·변용·해체시키면서 풍류의 예맥(藝脈)을 우주화한다. 풍류의 예맥은 단순하게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적인 재료를 사용한다고 한국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풍류”라는 언어로 한국의 문화적 정통성을 언급한 최치원은 한국의 독창적인 사유세계를 외래사상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도 남음이 있는 “포함론(包含論)”으로 규정한다. 지면관계상 상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포함론은 단순히 외래사상을 습합하는 차원이 아니고 수용하고 융합하여 새로움을 창발하는 문화전통을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사유세계는 형성되어 왔다. 다시 말하면 주체적인 풍류적 예맥을 계승하고 동서의 화풍을 수용하고 융합하여 역사적인 ‘예술혼을 가진 나’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 한국의 인문예술과 예술인문에는 커다란 문화적 장벽이 존재한다. 중화적 세계관과 일제가 조작한 식민적 세계관, 그리고 제국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전혁림은 인문적인 지식으로 다양한 예술자료를 통해 한국화를 세계화하고 우주화한다. 그의 인문지식은 미술평론가에 의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특히 고대 동양화의 연원과 기독교의 성서에 아주 해박하였던 전혁림은 세계적인 화가라는 역사적 자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한다. 이런 역사적 공감대는 예술계에 전혁림이 있다면, 인문계에는 변찬린이 있다. ㅎㆍㄴㅂㆍㄺ 변찬린(邊燦麟, 1934~1985)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자신의 호를 “ㅎㆍㄴㅂㆍㄺ”이라고 할 정도로 동서의 사유를 회통하고 창발하여 새로운 축 시대를 열고자 한 문명사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전혁림과 비슷하게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한국의 인문예술의 원형인 풍류사상을 바탕으로 다양한 종교사상과 성서의 원리를 현대 학문과 종교사상을 회통시키며 '새로운 문명의 대안적 사유'를 제시하여 풍류담론이 가진 우월성을 현대에 입증한 사상가이다. 김범부, 함석헌, 유영모, 법정, 배용덕 등 당대의 선각자와 직간접적으로 교류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선방연가(禪房戀歌)》,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성경의 원리(상>, <성경의 원리(중>, <성경의 원리(하>, <요한계시록 신해>, 그의 인문학적 사유의 단편을 모은 <선맥 경전 ㅎㆍㄴㅂㆍㄺ학>등이 있다. 지방화가였던 전혁림을 중앙화단에 소개한 석도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풍류정신’이었다면 예술의 전혁림과 인문의 변찬린을 맥락짓는 기제 역시 ‘풍류의 예맥’이다. 풍류의 도맥(道脈)은 한국의 인문예술과 예술인문을 관통하는 한민족의 혼이다. 만약 변찬린을 저술을 읽고 전혁림의 작품을 감상한다면 새로운 평론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감한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인문예술가와 예술인문가는 자신의 작품활동이 세계적인 차원의 수준이라는 역사적 공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국수주의적 자평이 아니라고 사족을 달아야 할 정도로 우리의 인문예술과 예술인문의 평론세계는 사대화되고 식민화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박생광은 근현대 한국 화단에 짙게 내리운 중국풍과 일본풍의 화풍의 장막을 걷어내면서도 서양 화풍에 매몰되지 않고 충만한 감청과 적색과 주황으로 강렬한 한국을 그려냈었다. 또한 통영의 아들 전혁림도 외국 유학의 경험없이 특정한 스승도 두지 않고 풍류성을 지닌 보편색감으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겼다. 중화주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지 못한 수묵화와 일제강점기의 채색화를 우리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던 시기에 한국적인 것의 고유성과 그 고유한 한국적인 것의 보편성을 추구하던 박생광과 전혁림은 한국 화단의 보물이다. 그들로 인해 세계 화단에 한국화라는 이름표를 내밀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 홍영숙은 이런 풍류의 예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풍류화가이다. 다시 말하면 홍영숙 작가의 작품세계의 얼개는 한국의 사유적 원형인 자발성과 수용성, 회통성(會通性)과 발현성이라는 선맥의 풍류성, 즉 풍류적 예맥을 오롯이 표현하고 있다.
홍영숙은 풍류의 예맥을 대표할 만한 한국의 작가에 대해 “저는.. 묘사보다는 표현, 습득보다는 방법 추구라서 우리네 현대 작가는 와 닿지 않았는데..., 나름 박생광과 전혁림을 중간에 두고 인식할 수 있는 작가가 곽인식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물성 자체에 대한 탐구... 일본의 모노하가 한국의 단색화를 만들어냈고, 그 철학과 화상들을 한국으로 끌고 온 분이 이우환입니다. 이우환 작품 속엔 한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철학을 내세우며 침묵을 요구한다면 곽인식 작가는 작품 속에 시각화 과정을 통해 이해를 돕는 듯 해요. 그런 이유로(과정으로) 박생광 작가의 번지는 듯한 기법, 흡수되어 빨려버릴 듯한 화법이 어느 정도 엿보입니다. 박생광 선생은 더하여 한국이란 토속성을 리얼리티로 작업하셔서 좀 더 강렬하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특히 “한국미술의 자생력을 위해 독자적인 해석을 가미하며 계승 발전시켜오신 분이 박생광 화백이라면, 전혁림 화백은 서구의 구성과 단순화된 도형을 응용하여 한국미를 통해 발현할 수 있는 시도를 하신거구요. 그런 면에서 박생광과 전혁림, 두 작가는 한국에서 작업한 작가들로 한국의 미감을 위한 공통적인 추구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강조한다.
풍류화가로서 그녀는 동방의 한나라인 한국의 세계사 뒷전의 침묵처럼 개인사적인 고난과 수난을 감내하던 깊은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예술가에게 바위와 같은 침묵의 시간은 고귀하다. 효심을 가진 그녀의 가난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묵여뢰(?如雷)의 시간은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와 교감하는 성스러운 시간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듯이 가난한 효심은 존재와 공감하는 영원의 시간이다. 그의 침묵과 아픔과 고독은 《원 형상의 눈물방울》(1990년 초), 《Untitled Memory》(2012-2013), 《Old Story》(2013), 《동굴의 소리》(2022-2013), 《기억나는 이야기》(1993-2019) 등에서 표현되었다. 여기에는 힘겨웠던 뉴욕 유학 시절에 작가가 흘린 눈물과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소리, 그리고 순수한 예술이데아와 혼잡한 시장예술의 현실사이에서 작가가 느꼈을 뻔한 불투명한 심리가 투영되어 나온다.
그녀는 눈에 비친 빛이 아닌 빛깔과, 색이 아닌 색깔로 반사된 허상세계를 관조하면서 잠룡의 꿈을 꾸고 있다. 《날개 단 반 고흐》(2019)는 그녀의 작품세계를 구분하는 작품이다. 그녀는 유학 전에는 고흐와 같은 역사적인 작품을 하나 남기겠다는 옹골찬 꿈을 품었지만, 최근의 그녀의 도전(전혁림 미술상 수상 전부터)은 ‘작품과 함께 길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다.
작가는 “고흐는 미술사적으로 견주할 수 없는 열정의 소유자로 생전에 평가받지 못하고 죽었지요.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현대미술을 견인하는 시작점이라고 보게 됩니다. 그런 생각이 꺼지지 않는 불빛같은 비유적인 상징성으로 저에게 형해화되는 듯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런 다짐은 《꺼지지 않는 불꽃》(작업중)으로 형상화하면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기약한다.
풍류의 예맥(藝脈)을 계승한 풍류작가는 새로움을 수용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고 다양성을 접하면서 혼돈하지 않는다. 박생광과 전혁림의 한국적인 미술혼을 읽는 그녀는 한국의 역사적 작품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시도한다. 고구려 강서대묘의 무덤벽화를 해석한 《새, 날다》(2017), 백제금동향로에 공감한 《타오르는 형상》(2017), 단원의 “동방삭》을 새로운 시각으로 본 영생을 《꿈꾸는 동자》(2018), 신윤복의 섬세한 “미인도》을 창조적으로 바라본 《“깐깐한 여자》(2018),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와 유비된 《부처님 회상》(2019),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작가의 《다시 그린 몽유도원도》(2017)로 재현되고 있다. 《깐깐한 여자》는 박생광의 《“꽃가마》(1984), 《금산사의 추녀》(1984), 《무위사의 관음》(1984)과 같이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을 법하다. 풍류화가는 과감해야 한다. 틀에 박힌 화단의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불후의 작품을 남길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의 역사적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대상으로 삼는 당찬 화가의 새로움에 대한 과감한 시도는 평가되어야 한다. 그만큼 그녀의 작품은 주체적인 ‘자발성’이라는 풍류의 예술혼이 기저에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풍류작가는 한국의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수용하고 있다. 《우주의 기를 모으는 방법2(2016), 《혼을 부르는 소리》(2016), 《기도하는 손》(2017), 《“십자가를 따라..》(2017), 《색으로 그린 기도문》(2020), 《“호접몽》(2016), 《야무진 할렐루야》(2016), 《공자 헌정곡》(2018-2019), 《초혼》(2020), 《“다시 그린 몽유도원도》(2017), 《‘옴마니반메훔’과 함께》(2019), 《반가사유상》(2017-8), 《돌아오는 만다라》(2022-2023) 등의 작품이 있다. 전통문화로는 《12간지(2018-2020), 《돌림노래 (와당)》(2018), 《다시 그리는 정물 I》 (2018), 인물화로는 《깐깐한 여자》(2018), 《꿈꾸는 소녀 (2018) 동물화로는 《가가호호》(2016), 《골뱅이 풍경》(2016), 《A Summer Bird(2013)가 있는데 공간적으로 우주와 하늘과 바다와 땅을 아우르는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태극과 삼태극이 출현하는 작품과 《Under water Scene I》(2018), 《Under water Scene Ⅱ》(2018), 《Under water Scene III》(2018), 《골뱅이 풍경》(2016), 역사와 시대상을 반영한 《포스트 마더니즘의 날개》(2017), 《일상생활의 터치》(0000), 《Shaking Bouquet(2015), 《만들어지는 정원》(2016), 기원의 탐구에 대한 《I am...》(2015), 《태초에...》(2020),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과학문명을 염두에 둔 《사이보그 해바라기》(2016), 《갤럭시..?》(2019) 등과 같은 소재도 등장한다.
이런 거칠 것 같은 수용성이 한국 사유적 특성의 하나이다. 학연과 지연에 얽매어 특정 관점과 특정 화풍을 고집하는 것은 낡은 시대의 유물에 불과할 뿐이다. 우주화에서 일상화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의식흐름에 포착되는 사물과 사건은 작품에 따라 수작업과 컴퓨터 작업을 단독 혹은 결합하여 그대로 풍류혼을 맘껏 발휘한다.
무엇보다 풍류화가로서 작가의 작품에는 한국의 색혼(色魂)이 각인되어 있다. 외국에 유학하면서도 해외 화풍을 모방하기에 급급하지 않고 한국의 색, 즉 풍류색을 사용한다. 한국의 전통색이라는 오방색과 삼원색을 사용한다고 반드시 풍류색이 아니다. 색에 국경이 있을 리 없지만 설령 다른 나라의 전통색을 사용하더라도 한국의 색혼이 담긴 풍류색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보자. 빛이 응집한 하얀 바탕에 색으로 뭉친 검정이 하늘과 땅과 물과 바람을 사방에 배열되어 있다. 우주의 탄생이다. 그 가운데 위에는 빨강, 아래는 파랑이 태극문양을 그리고 있다. 이런 태극문양은 주역에서 천지비(天地否)괘상이라고 한다. 작가가 특별히 역(易)사상을 배웠을 것 같지는 않지만 천지비의 괘상마저 뒤집는 만행(?)을 일삼는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뒤집어지는 태극》(2021)을 그리곤 “우리 사회의 진취적인 앞날을 암시하는 작품》이라고 담백하게 설명한다. 태극기의 천지비가 뒤집어지면 지천태(地天泰)의 평화의 세상이 도래한다.
작가의 삼원색의 (삼)태극은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한국적 화색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존재의 근원과 영원의 시간을 담은 영성우주의 삼태극은 시공우주의 창조를 위하여 빨강과 파랑의 태극의 문양이 시공우주를 펼치고 있다. 《달려라 달려라》(2022), 《태초에...》(2020) 《태극의 기원》(2019), 《흩어지는 태극》(2019), 《자유, 평등, 평화》(2020) 《뒤집어지는 태극》(2021), 《색으로 그린 기도문》(2020) 등 (삼)태극을 모티브로 하는 그녀의 작품은 동서사유의 최고봉인 성서와 역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빨강과 파랑의 태극이라는 역의 사상은 성서의 계시록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같더라”(계 4 : 2-3)라는 성구와 이해지평에서 융합한다. 이를 최초로 밝힌 풍류사상가 변찬린은 만일 요한계시록의 편집자가 삼태극과 태극사상을 알았다면 요한계시록 4장 2절에서 3절의 부분을 어떻게 표시하였을까 반문한다. 하나님의 앉은 모양을 벽옥(파랑)과 홍보석(빨강)같다는 표현에서 색의 상징을 취한다. 이는 곧 태극의 문양을 말하는 것인데 성경편집자가 역(易)의 사상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한 것이라고 변찬린은 해석하고 있다.(변찬린, 『선맥·경전·ㅎㆍㄴㅂㆍㄺ학』, 동연, 2023, 231-232, 같은 저자, 『요한계시록 신해』, 한국신학연구소, 2019, 87) 그런데 작가는 성서의 텍스트도 아니고 역의 괘상도 아닌 영성적 직감으로서 이를 표현해 내고 있다. 과연 풍류화가 답지 않은가! 예술이론을 출간한 크라이브 벨(Clive Bell, 1881~1964)은 화면의 선과 형태, 색채는 미적 감정에 감응하는 의미있는 형식을 내재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그 외양의 표층에서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고 하였다. 이는 단순히 재현적 요소에 의지하기보다는 추상적 사고를 포괄하는 의미있는 예술 감상으로 작가와 관람자 사이의 공통적인 시각 분모를 도출하고 다양하고 가능한 사고를 위한 촉매로 작용하는 과정을 언급한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태극은 궁극적 본질로 해석할 수 있는 영상적 매개역할을 한다. 또한 작가의 작품이 철학적 이성과 파토스의 감성의 세계를 초극하는 영성예술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가 있다. 한국의 예맥(藝脈)을 계승한 작가는 이를 초의식적인 영성으로 발현한다.
설령 동아시아의 문화예술적 훈습을 받지 않은 서양화가가 태극을 그리더라도 작가가 직관하는 풍류색의 느낌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서양화가는 풍류색을 모방할 필요도 없다. 각양각색의 화가들은 자신의 역사적 삶의 정황에서 자신의 특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표현하면 된다.
풍류세계는 다양성의 통일성을 지향하지 않고 다양성의 조화를 지향한다. 통일성은 획일성을 전제로 하는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풍류세계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프랙탈세계이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화엄세계이다.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이 《달려라 달려》(2002)이다. 낡은 우주를 혁명하려고 숨겨진 영성우주의 장막을 젖히고 나오는 푸른(동방의 색)말이 숨겨졌던 노란색을 머리에 묻히며 한국인이 앞장 서서 ‘달려라 달려’를 외치며 시름에 젖어있는 인류를 일깨운다. 찰나성과 역동성과 시기성을 갖춘 이 작품은 코로나 시대가 끝날 즈음 엔데믹 시대에 이젠 ‘우리가 나설 차례’라고 한국 화단에 외친다. 풍류작가가 말하려는 소리를 푸른 말에게 들어보라.
고요한 ‘혁명’을 추동하는 풍류작가는 낡은 문명을 새 문명으로 혁신하려는 색의 혁명을 시도한다. 녹색은 생명의 색깔이지만 검은 빛을 띤 듯한 애수에 어린 작가의 녹색은 낡고 죽어가는 고통의 색으로 표현된다. 《Song for The Death of Colors》(2014)가 대표적이다. 작가는 이미 안다. 삼광색의 결정체인 흰빛과 이를 숨긴 삼원색의 검은 색은 생명을 잃은 죽음의 색이라는 것을. 이런 측면에서 생명세계를 상징하는 녹색이 빛과 색사이에서, 낡음과 새로움, 영원과 찰나, 성과 속, 아름다움과 추함, 순수와 오염, 창조와 진화 등에서 우주의 생명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처연한 죽음의 고통으로 표현되고 있다. 《따로, 또 같이...》(2019)에서 보듯이 온갖 이분적인 분열과 차별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것이 작가의 작품세계가 지향하는 지점이 아니다. 온 생명이 ‘ㅎㆍㄴ’을 깨닫고 ‘ㅂㆍㄺ(빛)’으로 빚어내는, 즉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의 진면목을 찾아내라는 것이 작가의 당위요청이다.
그럼 풍류작가가 인간에게 돌리는 관심은 어떨까? 다시 《뒤집어지는 태극》(2021)을 보자. 태극의 문양에 선남선녀가 사랑하고 교감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파랑의 건도성남(乾道成男)한 남자와 빨강의 곤도성녀(坤道成女)가 지천태를 이루려는 갈망, 그러면서 다소 선명한 남성상은 드러나지만 여성상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붉음을 간직하는 색상으로 표현된다. 한국의 ‘여성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한 풍류기법이다. 이는 남존여비의 유교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서구의 날선 ‘페미니즘’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청순한’ 소녀와 ‘그윽한’ 모성은 세상을 보듬고 양육하는 지구와 우주의 어머니이다. 부드러운 여성성은 날카로운 남성성을 보듬는다. 풍류의 ‘페미니즘’은 예리한 다름의 서구식 ‘페미니즘’을 보듬는다. 풍류세계는 음양, 즉 지천태라는 여성성이 천지비라는 남성성보다 먼저 작동되어야 조화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불같은 남성성이 위에 있고 물같은 여성성이 아래에 있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괘상(화수미제, 火水未濟)이고, 수화기제(水火旣濟)는 그 반대의 의미이다.
풍류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풍류작가인 홍영숙은 새로운 한국적 구상과 추상을 창출해 내고 있다. 구상과 추상이라는 서양화식의 구별이 아니라 구상과 추상을 포월하는 상(象, symbol)畵)이다. 상(象)에는 원래 구상과 추상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포착한 의식의 흐름, 굳이 표현하다면 “영상(靈象, spiritual symbol)》(이하 ‘영상’이라고 표기)이라고 명명해 본다. 풍류의 예맥을 계승한 작가들은 추상과 구상의 서양화단의 분별과 차별의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작가는 늘 자신의 영상을 표현한다. 관객은 그의 영상을 추적하여야만 작가와 소통하며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영상은 영원한 무한을 포착하는 찰나의 ‘나’에게 발현된다. 왜냐하면 작품은 영원의 소리와 무한의 존재와 진리의 실상을 역사적인 ‘나’를 통해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의 지향점은 《원형의 춤》(2016)과 《바람의 노래》(2020)에서 나타난다. 두 작품은 낡음과 죽음의 역사적 문명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영상이다. 작가의 작품 가운데 노랑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는 흔지 않다. 《원형의 춤》은 살아서 죽고 죽고 살아나는 생명의 약동을 그리고 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창조적 진화하며 생명을 구현하는 부활우주를 영상한다. 모든 죽어가는 녹색의 생명은 영원회귀의 의미없는 삶을 통해서라도 참 생명을 살아내어야 한다는 작가의 바램을 담고 있다. 반면에 《바람의 노래》는 풍류(風流)의 노래이다.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변화우주이다. 보라를 닮은 녹색은 참 생명의 색이다. 숨겨진 노랑색이 온 우주에 바람을 휘몰아치면서도 광풍이 아닌 온화한 바람이 불어온다. 생명의 바람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바람은 한 점 뿌리(씨앗)에서 시작한다. 그 한 점 씨앗의 뿌리가 인간이다. 영원으로 상승하려는 인간의 역사적 의지는 낡은 문명을 혁신시킨다. 빛과 색이 제자리를 지키면 뭇 생명이 자리매김하는 평화로운 세계가 구현된다. 풍류의 예맥이다. 풍류의 예맥은 풍류의 멋을 아는 풍류정신에 의해 예술작품에 풍류혼을 남긴다.
마치며
박생광과 전혁림의 풍류의 예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풍류작가인 홍영숙에게 전혁림 미술상이 수여된 것은 한국 화단의 경사이다. 작가는 전혁림 미술상의 권위로 인해 한국 화단에 등단되었지만, 앞으로 그녀의 예술적 행보는 전혁림 미술상을 세계 화단에 소개해야 할 책무가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제9회 전혁림 미술상은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이다.
작가는 한국의 예술혼, 그 풍류의 예맥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야 한다. 즉, 주체적인 자발성으로 다양한 사조를 수용하여 우주와 역사와 한국을 통합하고 융합하는 자리에서 영상으로 표현해내어야 한다. 작가는 미술상이 가진 본래의 취지였던 “한국 예술혼을 가진 작가로써 세계 화단의 큰 인물”로 알려지기를 기대해 본다. 필자의 작은 바램을 담아 본다.
이제 작가는 평상심으로 되돌아가야한다. 하늘이 주신 ‘가난’의 선물을 보배롭게 여기고 부유 속에서 부패해 가는 ‘자본’의 유혹과 타협하지 마시라. 학맥과 사조와 화랑에 옥죄인 폐쇄적인 풍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하시라. 그리고 작품세계에 무한의 종교성과 철학적 이성과 과학적 미래를 둠뿍 담고 역사적 씨ㅇㆍㄹ이 공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위대한(!) 작품을 많이 남기시라.
풍류화가 홍영숙 작가의 제9회 전혁림 미술상 수상과 제10회 전혁림 예술제의 전시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